내포신앙의 못자리,
원머리

사제 성소 발굴과 학교 운영
  • 두세신부는 박프란시스코라는 신학생을 발굴하여 1882년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 유학을 보내지만 1892년 3월 열대지방에서 얻은 병으로 원머리 최초의 신학생이 사망하였다.
  • 내포지방 최초로 언문과 경문을 가르치는 소규모 학교가 3개 세워졌는데 그 중 하나가 원머리(1891년)에 설립되었다. 그곳에서 신자들의 교리교육 및 냉담자 권면, 예비자 교리교육도 실시하였다.
  • 또 비신자 자녀의 학생들 교육도 실시했지만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다. 퀴틀리에 신부 때 학생수는 10명 정도였고 운영은 공소전(公所錢)으로 일부 충당하였다.
내포 신앙의 못자리, 원머리 공동체와 공소들의 발전
  • 공소가 더 발전하여 1920년 중반의 기록을 보면 공소 회장들이 냉담자를 찾아내고 예비자 교리교육에 열성을 드리는 등 모범적인 사례가 드러나면서 원머리, 새터, 음섬 공소 등이 더욱 활성화되고 원활하게 발전되어 갔다.
  • 신자들은 장례를 통해 신앙의 모범을 잘 보여주어 주변 비신자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또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신자들이 늘어나자 예전과는 반대로 신자들의 생활방식에 비신자들이 적응해서 살아가거나 아예 입교하여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 교우촌 형태로 마을 분위기가 바뀌어 갔다.
  • 그 후 더 커진 새터 공소는 모임을 위한 강당을 별도로 가질 정도로 번창하였으며 1929년 성탄절에는 구유헌금을 모아 서울 명동에 있는 고아원을 도와주기도 했다.
  • 원머리 지역을 벗어난 신평지역에 공소가 처음 생긴 지역은 신송리(1922년) 였다. 그 외에 신당(1926년), 거산(1946년), 초대(1958년), 운정(1962년), 금천(1962년), 전대(1976년)공소가 차례로 설립되었다.
  • 따라서 내포지역은 한국천주교회의 '신앙의 못자리'로 조선 천주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데 원머리 공동체 또한 그 한 축을 크게 이룬다.
☞  못자리란? 볍씨를 뿌려 씨가 발아한 자리란 뜻.
근현대 순교자 탄생
  •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수 많은 박해를 받았음에도 모범적인 삶으로 주변 이웃들을 감화시켜 교우촌을 계속해서 형성 발전해 나갔다.

박영옥 부회장

유영근 신부

  • 1950년 6.25전쟁 당시 종교를 아편으로 여기고 박해하던 북한 인민군들은 원머리와 새터 두 공소 회장을 사살하는데 다행히도 원머리공소 박원근 바르나바는 총상만 입고 목숨을 건지지만 새터공소 박영옥 안드레아는 피살되었다.
  • 유영근 요한 세례자 신부는 공세리에서 태어났지만 음섬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1932년에 사제품을 받고 충청도 감곡 등지에서 사목을 하였다.
    1950년 7월 11일 당시 명동성당 당가였던 유신부는 인민군에게 체포되는데 북으로 끌려가다가 1950년 10월 평북 운산 온정리에서 험준한 우현령을 넘다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