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대박해와
원머리 교우촌 순교자

초기 교인들의 입교 동기와 박해의 원인
  • 천주교회는 당시 조선사회의 성리학의 학문적 한계성 때문에 과학과 실사구시를 추구한 남인 일부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 하느님 앞에 만인은 평등하고 모두 하느님 자녀로서 한 형제자매라는 가르침과 사회관은 양반과 상민,
    남자와 여자라는 엄격한 신분 차별이 있던 그 당시 사회에서는 사회적 개혁을 이룰 수 있는 가치관
    으로 인식 되었다.
  • 그래서 신분과 성별을 초월한 민중 종교의 형태로 발전해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고 특히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역할과 정조의 관대한 정책으로 교세가 더욱 확대 되었다.
  • 이런 복음정신과 평등사상은 신분적 질서를 기반으로 한 조선왕조의 사회구조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나
    (양반, 중인, 천민 등) 부정적인 면에서는 약 100여 년 동안 탄압받고 박해 받는 주요 원인이 되었고 약 1만명 가량
    순교하였다.
  • 박해의 주요 원인들은 첫째, 천주교 금령에 따라 거부한 조상제사 문제였고 둘째, 그 당시 사회의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두는 가치관 차이였고 셋째, 정치적 명목인 당파 싸움이었다.
대 박해와 원머리 교우촌
  • 천주교 대박해
    -  조선 천주교회는 초창기 약 100년 동안 크고 작은 박해가 많았었으나 그 중 4대 대박해는 시기도 길고 조정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  4대 대박해로는 1801년 신유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와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가 있다.
  • 박해 시기 원머리 지역
    -  이 시기에 많은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지방과 산간으로 숨어들어 가 살았는데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신앙이   퍼져 나가는 계기(지방선교의 시작)가 되었다.
    -  원머리 지역 또한 다른 곳과는 달리 조수에 따라 섬으로 변하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내포 평지 해안가이면서도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는 교우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  그 결과 많은 교우들이 원머리 교우촌에서 더불어 살았고 마지막 병인 대박해 때에는 20분의 치명자들이 붙잡혀  순교하게 되었다.
  • 원머리 교우촌 생활상
    -  이곳 지역은 어업과 간척지 농사일이 생계의 주 수단이었지만 특히 교우들은 염판과 옹기굽는
       일을 주로 하였다.
    -  소금과 옹기행상은 행상의 특성 상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직업이었기에 박해와 포졸들의
       감시를 피해 쉽게 떠날 수 있었고 또신자와 비신자에게 신앙을 알리고 전파하는데 적합한 전교
       수단이기도 했다.
원머리 교우촌 순교자
  • 병인 대박해 시기에 원머리에서 순교한 치명자들은 총 20명인데 순교 형식을 보면 교수형이 10명으로 가장 많고 생매장이 6명 이며, 순교형태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4명이다.

  • 순교 형식을 보면 교수형이 10명으로 가장 많고, 생매장형이 6명이며 순교 형태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4명이다.
  • 순교 장소로는 홍주가 16명, 해미가 2명, 수원감영이 2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원머리가 충청도 홍주 관할이었는데도 해미와 수원으로 끌려가 처형당한 이유는 1868년 무진년에 다시 박해가
    확대되면서 도(道)경계, 행정· 군사 관할 지역과 상관없이 천주교 신자들 체포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 순교 연도와 함께 치명자의 이름을 기억해 보면, 1866년에 6명(한마티아, 양정수, 홍베드로닐라, 양명삼,
    최아우구스티노, 홍베드로)이, 1867년에 5명(김마리아, 원(여), 양도미니코,김자선의 모친,송춘일)이 순교하였다.
  • 1868년 무진년에는 8명(박요한, 문마리아, 박마르코, 박미티아, 최베드로, 김루치아, 김마리아, 원아나스타시아)의 치명자가 연도 미상자 1명(양아우구스티노)과 함께 굳건한 용덕을 보이며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