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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교우촌과 공소 형성(김정환신부)

II. 신평지역의 공소사 연구


 

김정환(내포교회사연구소)

 

1. 머리말

 

1) 선교사들의 재입국과 사목방문 

2) 합덕본당의 설립

3. 신평지역의 공소들 

1) 원머리 공동체의 부활 

2) 원머리와 새터 

3) 음섬이와 주변 공소들 

4. 신평본당의 설립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를 혹독히 경험한 내포지방의 신앙공동체는 병인박해(1866년) 이후 공동체가 와해되어 사라지거나, 본래의 지역에 공동체가 다시 형성되더라도 그 구성원들이 바뀌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신평지역을 대표하는 신앙공동체인 원머리 일대에는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했던 기존의 신자들 상당수가 다시 돌아와 병인박해 후 30년이 지나지 않아 공동체가 복원되었다. 이후 이곳에는 원머리(한정), 새터(매산), 음섬 공소가 차례로 설립되었고, 후대에는 맷돌포공소까지 분가하여 전국에서 보기 드물게 한 지역 안에 가장 많은 공소와 신자가 밀집한 신앙공동체로 성장하였다.

박해의 영향이 점점 사라지고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기가 되면서 1890년에 이르러 이 지역 최초의 합덕본당이 설립되었다. 이후 1960년 신합덕본당이 설립되고, 1975년 신평본당이 설립되면서 원머리(한정), 새터(매산), 음섬의 세 공소는 차례로 그 소속이 변경되었지만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지역 복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제 그 공동체의 역사를 보면서 어떤 원동력에 의해 신앙공동체가 되살아나고, 또한 그들이 지역 사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신앙자유기의 신평지역 교회사

1) 선교사들의 재입국과 사목방문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한 후에도 병인박해의 영향은 여전하여 선교사들이 쉽게 재입국할 수 없었다. 1876년에 이르러서야 블랑, 드게트 신부가 조선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입국할 수 있었고, 1877년에는 리델 주교, 두세, 로베르 신부가 차례로 입국하였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조선 정부는 언제까지나 쇄국정책으로 일관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달았다. 조선은 변해가고 있었고 그것을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리델 주교의 추방사건이었다. 1877년 조선에 재입국한 리델 주교는 이듬해 1월 서울에서 체포되었으나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의 요청에 따라 중국 정부가 개입하여 6월에 중국 국경을 통해 추방되었다. 밀입국한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되지 않고 추방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외세 앞에 풍전등화 같던 조선은 이 시기에 이르러 급격한 대외적 변화를 겪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1882), 제물포 개항(1883), 한러수호통상조약(1884), 한이수호통상조약(1884)이 이루어졌다. 1882년에 한미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도 한국과의 조약체결을 시도하였으나 종교자유에 대한 문제로 조약체결에 난항을 겪다가 1886년에 이르러서야 한불수호통상조약(한불조약)이 이루어졌다. 다른 나라에 비해 조약이 늦어진 이유는 프랑스가 선교의 자유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교회’(敎誨)라는 말을 조항에 추가하여 선교사들의 가르침만을 허용하는 선에서 타협이 되었다. 이 조약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은 호조를 지니고 조선 내지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으며 이전처럼 상복을 입고 다니지 않고 성직자 복장을 할 수 있었다.

한불조약 이후 1900년대 초반까지 한국 교회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였다. 정부의 공식적인 박해는 없었으나 민중들 사이에 퍼져 있는 뿌리 깊은 박해 의식을 극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신앙의 자유가 용인되었으나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상태로 표현될 수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가운데 선교사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의 내지를 순회하며 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하였는데 신평지역이 속한 내포지방을 순회한 첫 선교사는 두세(Doucet, 정가미 가밀로) 신부였다. 1883년 가을에서 1884년 봄에 이르는 시기의 첫 방문에서 원머리와 새터에 신자들이 살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해부터 정기적으로 사목방문을 하였는데 그가 작성한 교세통계표의 두 지역 신자 현황은 다음과 같다.

 

 

연도

원머리(한정)

새터(매산)

신자(명)

성인영세자

신자(명)

성인영세자

1884

미상

미상

1885

78

1

72

1

1886

117

2

119

3

1887

92

2

110

3

1888

10

140

4

1889

54

2

120

6

1890

84

2

81

1

 

원머리와 새터는 신평지역을 대표하는 신자 거주지로서 합덕본당이 설립될 때까지 꾸준히 성장하여 이 지역 복음화의 한 축이 되었다.

 

2) 합덕본당의 설립

병인박해로 철저히 파괴되었던 내포지방은 박해의 영향이 사라지면서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거나 새 신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충청남도 지역 최초의 본당이 이곳에 세워졌는데 1890년에 함께 설립된 합덕본당과 공세리본당은 두 축이 되어 충청남도의 거의 모든 지역을 담당하였다.

 

 

합덕본당

공세리본당

공소 이름

현주소

공소 이름

현주소

소길리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

간양골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가재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해사동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대방이

서산시 성연면 명천리

샘재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1구

서낭골

부원골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4구

안면도

태안군 고남면 누동리2구

넛직막이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4구

마새

당진군 대호지면 마중리

보산원

천안시 광덕면 보산원리

황소고개

서산시 고북면 용암리

원당이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

강당이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가래기

아산시 선장면 가산리 2구

원머리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

명지게미

아산시 송악면 수곡리

새터

당진군 신평면 매산리

숫골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

양촌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뒷내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진말

예산군 신암면 계촌리

당개

아산시 영인면 창룡리

도덕골

예산군 신양면 여래미리

덕지

아산시 음봉면 덕지리

우라네

서들골

천안시 목천읍 송전리 서덕동

닥밧실

부여군 은산면 거전리

쇠골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1구

나마리

배티

방고개

궁말

천안시 성환읍 안궁리 (혹은) 풍세면 풍서리 궁천

강경

논산시 강경읍 강경상고

우헐리

천안시 성환읍 우신리

판서골

보령시 천북면 신덕리

우헐리 새터

천안시 성환읍 우신리 2구

월봉

서천군 판교면 심동리

용화실

서천군 마서면 덕암리

작은재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

독뫼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여내골

도앙골

고당

부여군 구룡면 용당리

솔티

청양군 정산면 송학리

공주

안골

공주시 정안면 내문리

요골

공주시 유구면 명곡2리

새터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만악골

사기점골

공주시 유구면 명곡1리

삼배실

공주시 이인면 운암리

총 1,951명

총 1,143명

 

신평지역을 관할하는 합덕본당의 시작은 1890년에 초대 주임인 퀴를리에 신부를 이 지역으로 파견한 데서 비롯된다. 이전에도 두세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여 판공을 치르곤 하였으나 본당 주임신부의 역할은 아니었다. 아직 박해의 영향이 남아 있어서 이 지역을 관할하는 본당을 설정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합덕본당이 처음부터 합덕(합덕읍 합덕리)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초대 주임신부가 작성한 사목보고서를 보면 초기 2년 동안은 어느 곳에 본당을 세워야할지 고심하던 중 신자가 가장 많은 서산 소길리(서산시 팔봉면 금학리)에 자리를 잡으려 하였으나 마침내 1892년 양촌(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정착하였다. 양촌과 지척에 있는 신리는 병인박해 순교자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가 거처하던 곳이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된 땅이었다. 하지만 양촌은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보건데 본당으로써 적합한 곳이 못되었기에 초대 신부는 조그마한 언덕이 있고 큰길가에 위치해 있어 교통이 편리한 창말, 즉 현재의 합덕 성당이 있는 곳으로 본당 자리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합덕으로 이주했을 당시 주변에는 2~3호 정도의 신자들만이 살고 있었으나 개종 운동이 일어나고 신자들이 이주하면서 교우촌으로 변모하였다. 교세가 증가하자 1929년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큰 성당을 지으며 또 한 차례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합덕본당은 1908년 서산, 1927년 예산, 1939년 당진 본당을 차례로 분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대전교구가 설정되던 1948년 충청남도지역(대전 포함)에서 가장 큰 본당이었다. 신평지역은 1960년 신합덕본당이 설립될 때까지 합덕본당 소속이었으며 원머리 일대의 공소들에 대부분의 신자가 거주하고 있었다.

 

3. 신평지역의 공소들

1) 원머리 공동체의 부활

신평지역의 교회사에서 뿌리가 되는 곳은 원머리로 여기에 첫 공소가 설립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부터 신자들이 살았던 원머리에는 이곳 태생의 신자들과 외지에서 이주해온 신자들에 의해 나름대로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갯벌을 막는 둑의 첫 지역'의 우리말 표현인 '언머리'에서 이름이 유래된 원머리는 그 이름에서 보듯이 새로 개간된 땅이 많은 곳이어서 외지에서 이주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 처음 이주해온 사람들은 주로 신자들이었거나, 후일 신자가 된 이들 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양씨, 마씨, 한씨, 박씨, 조씨 순이었다고 한다. <<노상추 일기>>의 기록을 보면 1801년 원머리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 중에 양남산이란 인물이 있고, 박해시대 때부터 원머리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양씨, 박씨, 조씨의 후손들이 동일한 증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성씨별 이주 순서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원머리는 신자들과 비신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마을로 농업과 어업(예를 들어 염전)을 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병인박해의 연장인 무진박해(1868) 이후 원머리의 신자들은 순교하거나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박해가 진정되면서 상당수의 신자들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와 신앙공동체의 주역이 되었다.

병인박해 기간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도 4명이나 되는 양씨 집안은 박해로 후손들이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으나 그중 몇몇이 다시 돌아와 원머리에서 대를 이으며 살았다. 순교자의 무덤이 있는 밀양 박씨 집안도 마찬가지로 박해로 흩어졌던 그의 집안도 박해가 진정되면서 일부가 원머리로 되돌아왔다. 원머리 순교자 박선진(마르코)의 후손들도 원머리로 되돌아와 살았고 다른 일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15대째 신자 집안으로 원머리에 대를 이어 살아온 박재수(요한) 회장의 증언은 박해 이후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선대는 멀지 않은 원치리(당진군 우강면)로 피신하였다가 박재수의 아버지 박영진(치릴로)이 4살 무렵인 1923년경에 원머리로 돌아와 살았다. 본시 박해 전에는 농토가 많은 집안이었으나 돌아온 이후에는 어렵게 살 수밖에 없었다. 이때 원머리에는 대대로 살아온 비신자 양반인 파평 윤씨 집안이 있었는데 두 집안 간에 사이가 좋아 박씨 집안이 신자라는 이유로 곤란한 상황에 부딪치면 적극적으로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박재수의 어머니 조정외(비르짓다) 집안 역시 비슷한 삶을 살았다. 원머리에서 대를 이어 신자로서 살아온 조씨 집안도 박해를 피해 흩어졌다가 다시 원머리로 돌아왔다. 그녀의 증조부(이름은 기억 못함)는 박해로 인해 냉담한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적극적으로 권면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일을 위해 한 번 집을 나서면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2~3개월씩 전교에 나서곤 하였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되살아난 원머리 신앙공동체는 인근 삽교천 상류변의 신리 공동체와는 차이를 보인다. 조선후기 박해기간 동안 신리는 전국에서 가장 큰 교우촌으로 주민 400여 명이 모두 신자일 만큼 튼튼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박해가 일어나자 신리 교우촌은 초토화되어 이후 재기하지 못하였고 18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신리는 천주교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사는 비신자 마을로 변해 있었다.

반면 원머리 일대는 1885년의 교세통계에 원머리에 78명, 인근 새터에 72명의 신자가 있을 정도로 신앙공동체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 원인은 박해시대의 원머리가 비신자들과 함께 섞여 사는 마을이었다는 점과 이곳에 뿌리를 내린 주요 성씨들 안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다. 원머리에 대를 이어 거주하던 양씨, 마씨, 한씨, 박씨, 조씨 등은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의 원머리 관련 자료들을 참조하면 같은 성씨 안에서도 신자들이 아닌 사람들이 있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박재수(요한) 모자(母子)의 증언 내용에서도 보듯이 파평 윤씨와 같이 아무도 신자가 아닌 집안도 함께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이점이 신리와 다른 점으로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는 큰 장점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박해 이전부터 함께 생활하던 비신자들이, 피난했던 신자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로 말미암아 박해시대나 그 이후의 시기에도 같은 집안이 같은 지역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원머리와 새터

박해 이후 되살아난 원머리 신앙공동체는 빠르게 성장하여 1883~1884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두세 신부가 처음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에는 원머리(한정)와 새터(매산)를 분리하여 사목방문을 할 만큼의 공동체가 성장해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1890년 합덕본당이 설립되었을 때 두 곳은 신평지역을 대표하는 공소가 되었다. 1891년 이후 계속 보고된 두 공소의 신자 현황은 다음과 같다.

 

 

연도

원머리(한정공소)

새터(매산공소)

신자

성인영세자

신자

성인영세자

1891

83

1

69

3

1892

110

1

100

1893

95

3

120

5

1894

보고 없음

보고 없음

1895

115

170

5

1896

105

1

보고 없음

1897

115

3

113

8

1898

118

120

1899

112

1

113

3

1900

110

3

129

5

1901

111

4

135

1902

200

4

122

1

1903

100

127

1904

94

1

127

2

1905

1909년까지 보고서 없음

1910

120

132

3

1911

120

138

1912

110

1

143

1913

109

136

1914

122

1

133

1915

119

2

132

1916

128

136

1917

129

144

1

1918

148

1

153

3

1919

150

161

1920

129

162

1921

172

130

1922

119

1

154

2

1923

119

162

3

1924

121

166

 

두 공소는 합덕본당 초창기부터 줄곧 규모가 큰 공동체로 1891년 보고서에 따르면 원머리에는 소규모의 학교가 있었다.

“공소전으로 운영비의 일부를 충당하고 있는 학교는 세 개인데, 원머리에 하나, 고당에 하나, 그리고 소길리에 있습니다. 두세 신부가 충청도를 떠난 후로는 원머리 학교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학교는 제게 크게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곳에 공소를 하러 갔을 때, 학생이 5명뿐이었는데, 선생은 급료를 충분히 받지 못한다는 구실로 낙심되어 있었습니다."

합덕본당은 신자들만을 위한 주일학교가 아닌 일반 학생들의 교육까지도 담당하는 학교로 성장시키기 위해 몇 곳에 이러한 학교들을 설립하였으나 당시의 여건상 운영이 쉽지 않았다. 원머리의 학교는 학생 수가 1897년에 7명, 1894년에 4명으로 나타는데 이후 일반 학교가 아닌 주일학교로 변모된 듯하다.

합덕본당에서 학교 못지않게 신경을 쓰는 것이 고아들의 양육이었다. 박해시대인 1854년 프랑스로부터 성영회(聖孾會, l'Oeuvre de la Sainte Enfance)를 도입한 이후 한국 교회는 고아들의 양육과 죽어가는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베푸는 일에 적극 나섰다. 1894년의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합덕본당에는 총12명의 고아들을 각 가정에서 돌보고 있었고 그중 새터(매산)공소의 성 안드레아와 최 바오로 집안에서 각각 1명씩 양육하였다. 한편 1899년의 기록에 의하면 새터에는 신학생이 한 명있었다. 페낭 신학교 출신의 신학생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박 프란치스코는 안타깝게도 새터에서 사망함으로써 사제의 길을 가지는 못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원머리와 새터공소가 병인박해 기간 동안 엄청난 박해를 겪은 공동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시간 안에 되살아나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899년 뮈텔 주교가 두 공소를 방문했을 때 적어놓은 기록 속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눈이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협소한 공소 집에 신자들이 모여 4일 동안 원머리에서는 80여명, 새터에서는 90명이 고해성사를 보는 모습은 짧은 기록이지만 인상적이다.

박해 이후 희망의 모습을 보여주던 두 공소에서도 그늘은 있었다. 1902년의 기록에 의하면 원머리와 새터는 혹독한 자연재해를 당하였다. 그해 봄부터 계속된 가뭄으로 두 마을에서는 8월 중순이 되도록 아무 것도 심을 수가 없었다. 인근에 저수지나 별도의 수리시설을 갖추지 못한 곳이었기에 피해는 더 심각하여 합덕본당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었다.

한편 1904년의 기록에는 비신자들과 섞여 사는 원머리의 난점이 지적되고 있다. 온전히 신자들고 구성된 교우촌 공소와 달리 원머리 지역은 주일을 제대로 지키며 살기가 어려운 조건이었다. 비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박해를 극복하는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었으나 온전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는 난점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점은 공소회장을 비롯한 지역 신자들의 열성으로 점차 극복되었다.

1920년 중반의 기록을 보면 원머리공소의 회장이 냉담자를 찾아내고, 예비자의 교리교육을 조직하는데 열성을 보이는 모습이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원머리, 새터, 음섬 공소에는 각각 주일학교가 운영되고 있어 교리교육은 물론 공소 운영 전체가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박원근(바르나바) 회장의 역할이 돋보였는데 그는 오랫동안 공소회장을 역임하면서 원머리공소의 틀을 잡아 놓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한편 신자들의 모범적인 삶의 모습은 주변을 감화시켰다. 장례를 통해 이 모습을 잘 드러내었는데 마을에 한 비신자가 대세를 받고 죽자 신자들 모두가 하나 되어 음식과 술을 금하며 장례를 엄숙하게 치름으로써 주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신자들이 늘어나자 예전과는 반대로 신자들의 생활방식에 비신자들이 적응해서 살아가거나, 아예 입교하여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형태로 마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원머리와 새터는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1914년 행정개편에 의해 한국의 지명들이 한자(漢字)로 표기되기 시작하면서 원머리는 한정공소로, 새터는 매산공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두 공소는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매산공소가 점차 더 커졌다. 그 결과 매산공소에는 모임을 위한 강당이 별도로 있었으나 한정공소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매산공소는 활동도 활발해져 1929년 성탄절에는 구유헌금을 모아 서울 명동에서 운영되고 있는 고아원에 성금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두 공소는 지역적인 조건으로 인해 공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공산주의 활동이 한국에 침투하면서 소작농이 많은 평야지대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한정리와 매산리 역시 그러한 곳이었다. 1929년 한정리에는 공산당에 가입했던 마름이 있어 반종교적인 선전을 함에 따라 한 때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50년 6․25전쟁기에 이르러 공산주의로 인한 어려움은 극명하게 드러나 두 공소의 회장들이 수난을 당하였다. 공산세력이 신평지역을 점령한 이후 원머리(한정)공소의 박원근 회장과 새터(매산)공소의 박영옥(안드레아) 부회장이 체포되어 당진 내무서에 수감되었다. 그해 9월 중순 공산군들은 모든 수감자들을 사살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박원근 회장은 총상을 크게 입고 목숨을 건졌으나, 박영옥 부회장은 피살되었다. 박 부회장은 병인박해 기간인 1867년 예산 간양골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박 안드레아 회장의 증손자로서 순교의 맥을 이었다.

1960년에 이르러 매산공소는 새로운 공소 강당을 신축하고 6월 15일에 천여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교구장 주교를 모시고 봉헌식을 가졌다. 강당 신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기사가 전한다.

"이 공소 건립운동은 1956년부터 시작되어 교우들은 성미(誠米) 운동을 일으켜 기금을 저축하여 기성회를 설치한지 어언 5년 이곳 교우들의 정성을 가상히 보신 라리보 주교님은 50만환의 원조를 베푸심으로 그들의 열성을 북돋아 주었으며 합덕본당 박 신부로부터 35만환의 협조를 얻어 지난 4월에 건평 36평 되는 양옥 건물을 기공하여 순전히 교우들의 헌신적인 노력 제공으로 공사가 완료된 것인데 인부의 품값을 가산하지 않은 총공사비가 2백 39만 6천 6백환이며 여기에 동원된 교우들의 연인원수는 9백 명(남자 6백 여자 3백)이나 되어 여교우들은 치마로 흙과 모래를 나르고 우마차를 동원하는 등 그야말로 눈물겨운 열성의 산물로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3) 음섬과 주변 공소들

음세미, 음섬이 등으로도 불리는 음섬(陰島. 신평면 매산리)은 3면이 바다로 되어 있어서 섬처럼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에서는 피아티라는 곳에서 공소가 시작되었는데 피난터가 변화된 말이라고 한다. 행정구역상 음섬과 같은 마을에 속한 매산공소가 점점 커지자 1915년경부터 공소를 분리하여 시작한 것이 음섬공소의 기원이라고 한다. 이는 신자가 많아지자 외떨어져있는 음섬 지역에서 우선 모임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조치인 듯하고, 정식으로 독립된 공소로 분리된 해는 1929년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합덕본당의 신자들이 큰 폭으로 증가하자 그 해에 음섬공소를 포함하여 다른 지역에 세 개의 공소가 더 독립하였다. 나아가 음섬공소는 1957년에 새로운 강당을 신축하고 7월 10일에 교구장 라리보(원형근 아드리아노) 주교와 각지의 신자들이 함께 한 가운데 봉헌식을 가졌다. 이후 성장을 거듭한 음섬공소는 1987년에 68세대 337명에 달할 정도가 되자 이듬해에 맷돌포공소를 분가해주기도 했다.

한정리(원머리)와 매산리(새터와 음섬)를 벗어나서 신평지역에서 공소가 생긴 첫 마을은 신송리였다. '소루지'로도 불리던 이 마을의 신자들은 다른 공소에 소속되지 않고 합덕 성당으로 미사와 성사를 보러 다니다가 신자가 증가하자 1922년부터 독립된 공소로 변모하였다. 하지만 초창기 신송공소는 공소로 쓰이는 집이 비신자 집들의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어 주일 모임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공소회장의 활동도 변변치 않아 1922년에 24명, 1923년 30명, 1924년 28명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20년대 중반부터 합덕본당 전체에 복음화의 바람이 불자 1928년에 신송리에도 죽음을 앞두고 대세를 청하는 비신자들이 현저히 늘어났고, 이듬해에는 신자도 34명에서 44명으로 증가하였다.

 

 

연도

매산

(새터)

음섬

한정

(원머리)

거산

신당

신송

초대

금천

1949

260

158

214

81

151

50

1950~1952년 전쟁기간 중 통계 없음

1953

280

173

252

75

119

1954

314

182

260

82

129

76

1955

330

154

263

82

126

1956~1960년 공소별 통계 없음

1961

338

216

295

94

130

35

58

1962

347

226

293

73

147

54

57

52

1963

376

226

312

77

141

95

63

76

1964

399

237

334

77

153

113

65

90

 

신송공소 외에 다른 공소들의 설립 연도는 신당공소(신평면 신당리) 1926년, 거산공소(신평면 거산리) 1946년, 초대공소(신평면 초대리) 1958년, 운정공소(신평면 운정리) 1962년, 금천공소(신평면 금천리) 1962년, 전대공소(송악면 전대리) 1976년 순이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인 1967년 대전교구에서는 형편이 어려운 공소들을 위해 로마에 원조를 요청한 바 있다. 당시 기록된 기록과 사진을 통해 몇몇 공소들의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우선 1946년 설립된 거산공소는 신자가 늘어나자 초대리에 공소를 분가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1967년에 이르러서는 신자 75명과 예비자 20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신자들의 형편이 어려워 그때까지 공소 강당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초가집 한 채를 공소 집으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결국 원조를 요청했던 것이다. 어려운 중에도 꾸준히 성장하던 거산공소는 산업화의 영향으로 이농현상이 발생하자 차차 작아져 1984년에는 44명의 공소로 남아 있었다.

거산공소에서 분가한 초대공소의 첫 신자는 안 마리아와 신 세실리아 두 처녀로 1953년에 세례를 받았다. 이들이 초대리에서 전교하여 1957년에는 여자 5명, 그 다음해에는 남자 2명이 더 입교하자 1958년 10월 13일 이곳을 관할하던 합덕본당 주임 박노열(바오로) 신부가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공소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작은 공소로 출발하였으나 10년 후인 1967년에는 신자 82명, 예비자 15명인 큰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공소 강당이 마련되지 않아 사랑채를 빌려 주일마다 공소예절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한국이 산업화되면서 초대공소 역시 거산공소와 같은 길을 걸었고 1984년에는 36명의 공소로 작아졌다.

 

4. 신평본당의 설립

과거 신평지역 신자들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곳이 한정(원머리), 매산(새터), 음섬의 세 공소였으므로 1960년 이후 이 지역에 두 차례에 걸친 본당 분가가 이루어질 때 원머리 일대는 본당이 설 자리로 검토되기도 하였다.

그 첫 번째인 신합덕본당이 신설될 때에 원머리 지역 신자들은 본당이 당연히 자신들의 지역에 세워져야 한다고 여겼다. 1961년의 통계를 보면 한정공소 신자가 295명, 매산공소 338명, 음섬공소 216명으로 세 공소의 합이 849명이어서 신합덕본당 전체 신자 1,915명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므로 그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었다. 이에 적극적으로 본당 유치를 추진하였으나 결국 버그내장터가 있는 신합덕에 본당이 들어서고 말았다.

1975년 신평본당이 신설될 때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신평면에 있는 매산, 한정, 음섬, 금천, 신당, 초대, 거산, 운정 8개 공소가 신설 본당에 소속되었는데 역시 대부분의 신자들은 원머리 일대에 있었다. 후대 자료인 1988년의 통계를 보면 매산공소 신자가 400명, 한정공소 297명, 음섬공소 290명으로 합계 987명이어서 신평본당의 총 신자 1,928명의 절반이 넘는 상태였다. 하지만 신평본당의 신설 때도 역시 행정과 교통의 중심지에 본당이 설립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 면소재지이며 시장이 있는 금정리에 새 본당이 자리하였다.

금천리의 신평본당 자리는 1962년 52명의 작은 공동체로 출발한 금천공소에서 비롯되는데 1967년에는 120명, 예비자도 43명을 헤아릴 만큼 빠르게 성장하였다. 이곳 역시 작은 공소 집에서 시작하였으나 금천리가 면소재지인데다가 향후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보이자 강당을 짓는 일이 시급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대지를 마련하였고 공소 집을 팔아서라도 강당을 지으려 했으나 그 일도 쉽지 않아 1967년에는 로마에 원조를 신청한 바 있다.

대전교구의 결정에 따라 1975년 4월 10일부로 신평본당이 설립되었을 때에 금천리에는 여전히 대지만 마련되어 있어 성당과 사제관으로 쓰일 이렇다 할 건물이 없는 상태였다. 이에 원머리공소에서는 자신들이 경작하던 간척지 7,636평을 매각하여 성당 건축기금으로 내놓아 공사를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신자들이 공소와 구역별로 신축 공사에 노력 봉사하였는데 가장 많은 신자들이 살고 있는 원머리 일대 신자들의 참여가 그만큼 더 많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본당 설립 다음해인 1976년 3월 19일 교구장 황민성 주교를 모시고 성당(89평)과 사제관(32평)을 봉헌할 수 있었다.

신평본당이 설립되고 한국의 산업화가 진행되어 이농인구가 점점 증가하는 가운데에도 원머리 일대의 공소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활발하였다. 1984년의 통계에 따르면 매산공소의 신자는 442명, 한정공소 337명, 음섬공소 312명으로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4년 후인 1988년의 통계를 보면 매산공소 400명, 한정공소 297명, 음섬공소 290명로 상당 부분 감소한 상태였고 1992년에는 모든 공소가 폐지되어 본당의 구역으로 편성됨으로써 신평지역을 대표하던 당당한 공소들로서의 위상은 쇠퇴하였다. 2011년 현재 한정(원머리), 매산(새터), 음섬, 신당, 전대 공소 5곳은 '공소'의 이름을 갖고 있고 레지오 마리애가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나 봄과 가을에 상징적으로 판공성사와 미사를 행할 뿐이어서 전통적인 공소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5. 맺음말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영향이 약해지면서 한국을 담당하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하여 내포지방을 처음 사목방문한 것은 1883년이었다. 병인박해를 가장 혹독하게 경험하여 생매장 순교자들이 생겨나기까지 하였던 원머리 일대에는 이때에 벌써 원머리(한정)와 새터(매산)에 신자공동체가 다시 형성되어 있었다. 1890년 이 지역 최초로 합덕본당이 설립되자 이들은 그 관할의 공소가 되어 신앙의 여정을 걸어갔다.

원머리 일대의 신앙공동체가 지닌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박해를 경험한 신자들 중 상당수가 다시 모여들어 대를 이어 계속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조선시대 가장 큰 교우촌이었던 신리가 한 때 완전한 비신자 마을로 변하였다가 전혀 다른 사람들로 채워진 것과는 대조된다. 그 이유는 신리와 달리 원머리 일대는 박해 이전에 신자와 비신자가 어우러져 사는 마을이어서 박해로 피난했던 신자들이 다시 돌아올 때에 비신자인 마을 사람들이 기존의 신자들을 받아들이는 기반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원머리(한정)공소와 새터(매산)공소가 중심이었던 이 지역 신앙공동체는 점차 확대되어 인근 음섬에도 공소가 생겨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자들의 비율이 점점 높아져, 박해 후 신앙공동체가 다시 형성된 초기에는 비신자들의 생활에 신자들이 적응해 살던 마을 환경이 반대로 신자들 중심으로 변해갔고 결국 지역민 거의 모두가 신자인 마을들로 바뀌었다.

원머리 일대의 세 공소, 즉 원머리(한정), 새터(매산), 음섬 공소는 신평지역에서 가장 많은 신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신자 수나 신앙생활의 전통 면에서 보면 본당으로 될 만한 곳이었다. 하지만 행정과 교통의 중심에서 벗어난 지역조건으로 말미암아 1960년 신합덕본당, 1975년 신평본당이 설립될 때에 전체 교세의 절반을 넘나드는 신자가 살고 있는 지역임에도 본당의 위치를 점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복음화뿐만 아니라 본당의 발전을 위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신평지역 복음화의 역사는 원머리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땅에 우리 교회가 수용된 초창기에 복음을 받아들인 후 희망을 품고 살아온 이 지역의 신앙공동체는 병인박해의 풍파 속에 한 때는 와해된 적도 있었다. 그런데 혹독한 박해를 경험한 신자들과 그 후손들이 다시 모여들어 공동체가 재건되어 이 지역 복음화와 본당이 설립되는데 산파의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박해보다 더 무서운 산업화의 물결로 인해 농촌인구가 감소하면서 활기찬 옛 공소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세상의 변화 속에서 많은 것이 사라졌으나 원머리 일대의 신앙공동체가 남겨놓은 영적 자산은 그대로 남아 있어 이제는 신평지역을 넘어 더 넓은 지역으로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박해시대 가장 혹독한 형벌로 꼽히는 생매장 순교자들의 터전이 있는 땅, 대를 이어 간직해온 원머리 순교자들의 무덤, 박해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를 거쳐 끊임없이 이어져온 공동체의 역사는 이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으며 영적 자산을 나누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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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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