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레이아웃이미지

성지

박해시기교우촌들

신앙의 못자리 여사울 성지


 

여사울 성지는 조선시대에 충청도 서북 지역을 지칭하는 내포 지역의 사도인 이존창 루도비코의 생가터가 있는 곳이다. 상당한 경제력을 지닌 양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존창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선교에 매진할 뿐만 아니라 가성직제도의 어긋남을 깨달은 뒤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배교를 하기도 했지만 그 뒤 홍산으로 이사한 후 지난 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고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그 어느 곳보다 교세가 커졌고 또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다시 체포된 이존창은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렇듯 여사울은 초기 내포 천주교회의 출발지이자 중심지로서 대전교구의 뿌리가 된 곳입니다.

 

 

오늘날 여사울은 맑고 성스럽기만 한 외관을 지니고 있지만, 그 역사 속에는 눈물과 핏방울들이 깃들여 있다. 과거의 여러 박해 속에서도 불구하고 여사울은 여러 명의 순교자를 탄생하는 순교자의 못자리 역할을 하게 되다.     우리는 이존창의 배교를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에 진정한 회두(回頭)가 있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신유박해로 서울로 압송되어 판결을 받고 공주로 이송된 그는 4월 10일(음력 2월 28일)에 희광이의 칼을 받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목은 여섯 번째 칼날을 받고서야 떨어졌는데,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둘 때는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단지 실날같은 훙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사울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신앙 공동체였고, 내포 천주교회의 출발지이자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1866년의 병인박해 때까지 신앙의 맥이 이어지게 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박해를 겪으면서  2분의 성인, 2분의 하느님의 종, 여러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키는 순교자의 못자리 역할도 하게 된다.  다블뤼 주교도 훗날 순교자들의 많은 수가 "오늘날(1850년대)의 천주교 신자들 대부분이 그 때 이존창이 입교 시킨 사람들의 후손들"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