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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일 위령의 날

11월2일 [위령의 날] <만일 죽음이 없다면, 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고통과 비참함을 어떻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우리에게 다가올 죽음,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작은 배 한척인 우리가, 거친 파도를 뒤로 하고, 잔잔한 항구인 주님 안에 정박하는 것이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지상 생활 동안 이곳 저곳 떠도는 나그네인 우리가, 파란만장했던 여정을 마무리짓고, 영원한 고향인 주님 안에 정착하는 것이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항해를 계속해온 배 한척이 종착지로 입항하지 않고, 쉼없이 바다 위에서 떠돌기만 한다면, 그 항해는 얼마나 피곤한 항해이겠습니까? 한 나그네가 종착지에 도착하지 않고, 늘 이곳저곳 떠돌이 생활만 계속해나간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가련한 인생이겠습니까? 한 인간의 생명이 150세, 200세가 되도록 죽음에 이르지 않고, 계속 지상에 머물러 있으면, 그 삶은 얼마나 지루하고 구차한 삶이겠습니까? 따지고 보니 죽음은 축복입니다. 중환자들의 임종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더욱 죽음이 은총임을 실감합니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한 인간 존재의 비참함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만일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는 결핍과 한계, 고통과 죄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죽음을 통해 그리도 그리워하던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사다리를 건너가야만 ‘지복직관’이라는 평생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도 극복하기 힘겨웠던 ‘나’와 ‘너’라는 산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모든 것을 해결하는 해결사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음과 관련해 한 가지 중요한 과제가 우리 앞에 주어집니다. 출생에 못지 않게 중요한 단계인 죽음에 대한 더 많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입니다. 나의 죽음, 너의 죽음, 세상 모든 존재들의 죽음이 보다 존중받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 어떤 사람의 죽음이든 숭고한 죽음, 아름다운 죽음이 되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요즘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 크게 강조하고 있는 존엄사를 위한 운동, 착한 죽음의 연습, 웰다잉을 돕기 위한 호스피스 운동 등은 너무나 소중한 노력입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모든 존재는 존귀합니다. 희망으로 가득 찬 신생아나 청소년의 생명도 존중받아야 하지만, 오늘 내일 하시는 환우들의 생명도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죽음과 관련해 바오로 사도가 남긴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죽음 앞에 초연했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한 존재의 전부가 되었을 때, 죽음조차도 기쁨이요 선물이요 축복이 될 수 있음을 바오로 사도는 온 몸으로 외치셨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필리피서 1장 20~24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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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백광열

등록일2018-11-02

조회수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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